
■ 간략한 책 소개
“선생님은 답사할 때 어떤 부분에 주목하시나요?”
“전부 다 봅니다”
『문헌학자의 현대 한국 답사기 1·2』는 2017년 여름부터 ‘도시 답사’를 시작한 문헌학자 김시덕의 답사 방법론과 그의 전국 답사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서울과 경기도라는 도시지역에 관심을 두고 출발한 김시덕의 답사는 어느덧 전국 곳곳의 도시는 물론 농촌, 산촌, 어촌 지역에까지 이르러 일종의 ‘문명론 탐구’라는 성격을 띠게 되었다. 급변하는 21세기 초 한국의 모습, 오늘날까지 이 땅에 발 딛고 살아온 시민들의 다채로운 삶을 김시덕은 생생히 포착해 낸다. 운전면허 없이, 오롯이 두 발로 뚜벅뚜벅 걸으며.
■ 출판사 서평
‘답사 방법론’에서 ‘문명론 탐구’까지
김시덕의 경계 없는 전국 기행
저자 김시덕은 문헌학의 방법론을 적용해 현대 한국의 ‘현재사’를 들여다본다. 거의 눈여겨보는 사람 없는 고문헌 뭉치 속에서 역사의 흔적을 발굴하듯, 전국 곳곳의 골목을 걸으며 집과 비석 등에 숨은 시민들의 이야기를 세상에 풀어낸다. 도시문헌학자가 바라보는 현대 한국의 모습은 어떨까? 전쟁과 자연재해가 휩쓴 자리에서 오늘도 밀려나는 사람과 건물. 잊히고 버려진 변방의 이야기들. 『문헌학자의 현대 한국 답사기 2』는 우리 앞에 살아온 존재들을 되짚고, 우리 뒤에 살아갈 존재들을 호명하며 지금 우리가 선 자리를 비춘다.
『문헌학자의 현대 한국 답사기 2』는 저자가 전국을 누비며 직접 찍은 풍부한 사진 자료가 돋보이는 책이다. 각 장의 도입부에는 주요 답사지를 구글 지도에서 볼 수 있는 QR 코드를 배치해, 가까운 곳부터 하나하나 걸어 볼 수 있도록 했다. 이 책을 들고 동네 곳곳을 답사해 보면 어떨까? 혼자서도 좋고, 여럿이면 더 좋다. 그리고 저자처럼 내 지역의 이야기를 사진과 글로 기록한다면 금상첨화다. 다음에 올 ‘미래 한국’의 독자를 위해.
우리는 무엇을 밟고 서 있는가?
이 길의 끝에는 무엇이 있는가?
도시는 ‘확장한다’. 중심에서 외곽으로, 철도와 도로를 따라. 도시는 ‘짓는다’. 나무를 베고 사람들을 쫓아내고 공장과 업무용 건물과 아파트를. 그래서 마을은 ‘헐린다’. 재개발과 재건축, 택지 개발로. 사람들은 고향을 ‘등진다’. 전쟁과 댐 건설에 따른 수몰, 자연재해와 격리, 신도시 개발이라는 이름 뒤의 강제 이주로…. 지금 우리는 어디에 ‘살고’ 있는가? 누구의 흔적을 ‘밟고’ 있는가?
대한민국은 오랜 역사를 지닌 땅에 들어선 나라다. 아주 먼 옛날부터 곳곳에 사람이 살았다. 따라서 이곳에는 원주민·선주민과 그들의 역사가 없는 땅은 거의 없다. 하지만 간신히 남겨진 그들의 흔적을 우리는 잊는다. 어쩌면 지워 버린다. 내가 사는 곳은 나날이 성장하고 발전하길 염원하면서도, 내가 살던 고향은 옛 모습대로 변치 않길 바란다.
문헌학자의 시선으로 도시 곳곳을 들여다보는 저자는 우리에게 ‘상대적인 인식을 지녀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책에서 그는 우리가 버리고 잊은 장소의 기억과 사람들의 기록을 길어 올린다. 농촌 마을 어귀의 이장(里長) 공덕비를 읽고, 간척지의 제방 위를 걷고, 산길을 헤치며 화전민의 흔적을 찾고, 산동네의 ‘타이거 모기’에게 쫓기며 써 내려간 기록이다.
지금 한국에서는 어떤 사람들이 잊히고,
또 어떤 사람들이 목소리를 내는가?
제1부 ‘현대 한국의 탄생을 역추적하다’에서 저자는 오늘날 대한민국의 모습을 낳은 장소의 기억들을 이 자리에 소환한다. 대전역 동쪽과 서쪽을 비교하며 철도역 주변의 핫 플레이스화와 공공 주택 지구 개발 사업을 들여다보고, 6·25전쟁 피란민 수용소의 흔적과 월턴 워커 장군의 길을 되짚는다. 또 부산 해운대구 재반로를 걸으면서 삼팔따라지 ‘월남민’과 베트남전쟁 난민 ‘월남민’의 삶을 되새긴다. 화재와 수재를 겪으며 도시를 재건한 부산과 영주, 순천의 역사를 조명하며 생산도시화를 향한 광주의 끝없는 도전도 살핀다.
기억을 담은 장소들에 이어, 제2부 ‘도시 끝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에서 저자는 사람들의 기록을 꼼꼼히 그러모은다. 원풍모방 노동조합원의 기록들을 통해 노조와 아파트, 상이용사촌이라는 대서울의 기억을 전하고, 재개발·재건축 사업이 촉발한 가장 날것의 충돌을 서울 서초구 방배중앙로를 걸으며 확인한다. 그런가 하면 ‘내 친구의 집’을 찾아가는 안양 벌말의 기억과 ‘벽화 사업’이 휩쓸고 지나간 약탈의 현실을 폭로하는 부산 문현동의 이야기는 저자의 시선이 어디에서 출발해 누구를 향하는지 여실히 보여 준다. ‘전도관’ 건물에 초점을 맞춰 신종교가 한국 시민들에게 남긴 유산을 짚는 대목에서는 당사자 인터뷰를 더해 당대 상황을 더욱 실감 나게 느낄 수 있도록 했다. 또한 한센병력자와 미군 위안부 기지촌 여성들의 증언을 따라 걷는 길은 우리가 외면해 버린 피해 생존자들의 인생을 고스란히 소환한다. 끝으로 영월 광산촌과 화성 향남읍에서는 산업 전환 끝에 남겨진 사람들, 다인종·다문화 국가 한국에 주목한다.
■ 저자 소개
지은이 김시덕
일주일에 서너 번은 동네 근처에서 먼 지방까지 다니며 도시 곳곳을 촬영하고 기록하는 도시 답사가이자, 도시에 남아 있는 지나간 시대의 흔적과 자취를 추적하며 도시의 역사와 현재를 탐구하고 예측하는 도시문헌학자다. 고려대학교 일어일문학과 학부와 석사과정을 거쳐, 일본의 국립 문헌학 연구소인 국문학연구자료관(총합연구대학원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고려대학교 일본연구센터 HK연구교수와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K교수를 역임했다.
주류의 이야기가 아닌 서민들의 삶에 초점을 맞춰 서울이라는 도시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기록한 ‘서울 선언’ 시리즈 『서울 선언』(2018 세종도서 선정), 『갈등 도시』(2020 세종도서 선정), 『대서울의 길』을 통해 언론과 대중의 주목을 받았고 관악구의 과거와 현재를 여러 각도에서 조망한 『관악구 문화 예술 기초 자료집: 관악 동네 역사』를 출간하며 지역 문화 발전에 이바지한 공을 인정받아 2021
년 제70회 서울특별시 문화상(학술 부문)을 수상했다. 그 밖의 주요 저서로는 『우리는 어디서 살아야 하는가』, 『동아시아, 해양과 대륙이 맞서다』(2015 세종도서 선정), 『일본인 이야기 1·2』, 『양천 동네 이야기』 등이 있다.
■ 차례
들어가며 : 대서울의 경계를 넘어 한국으로
제1부 : 현대 한국의 탄생을 역추적하다
01 대전역의 동쪽과 서쪽 : 핫 플레이스와 공공 주택 지구
02 헤방촌과 희망촌 : 6·25전쟁 피란민 수용소를 찾아서
03 월턴 워커 장군의 길 : 전쟁 영웅의 흔적들
04 부산 해운대구 재반로 : 두 피란민의 길
05 세 번의 화재, 네 개의 비석 : 1953~1954년 부산 대화재
06 생산도시 광주 : 이제는 사라진 IBRD 차관 단지에 대하여
07 영주 근대역사문화거리 : 부석사와 소수서원에 가려진 영주
08 오늘날의 순천이 되기까지 : 전라선 철도와 1962년 수재
제2부 : 도시 끝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01 원풍모방을 기억하는 관점 : 노조, 아파트, 상이용사촌
02 서울 서초구 방배중앙로 : 도시에서 행해진 ‘도축’
03 평촌 신도시와 안양 벌말 :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04 부산 문현동 벽화 마을 : 레트로 감성과 붓질이 지나간 자리
05 신종교 : 대서울 외곽의 ‘전도관’ 풍경
06 한센인의 현대 한국 : 민주공화국의 피해자들
07 영월 광산촌 : 산업 전환과 남겨진 사람들
08 미군 위안부 기지촌 : 김정자 선생의 흔적을 따라가는 답사
09 화성 향남읍 : 다인종·다문화 국가 한국
나오며 : 기록들이 더는 사라지지 않도록
■ 책 속으로
장림동 정책 이주지의 어느 골목에서 ‘새부산이용원’이라는 가게를 마주친 저는, 이제는 사라진 서울 송파구 거여동의 철거민 정착지를 떠올렸습니다. 그 인근에 있던 군부대가 경기도 동남부로 이전하고 위례 신도시가 건설되기 시작하자, 군부대 옆에 형성되었던 거여동 철거민 정착촌에서도 2017년 철거가 진행되었지요.
한 시대의 끝을 기록하기 위해 거여동 철거민촌을 걷던 저는 ‘새서울이발관’이라는 문 닫은 가게와 마주쳤더랍니다. 1967~1971년에 서울 중심부에서 끝자락으로 쫓겨나서도 서울 시민으로 남고자 ‘새서울’이라는 이름을 붙였을 가게 주인은, 아마 그 바람을 끝내 이루지 못한 채 또다시 철거를 당했을 것입니다. 부산 장림동의 새부산이용원은 서울 거여동의 새서울이발관과는 다른, 행복한 결말을 맞이할 수 있기를 마음 깊이 기원합니다.
본문 59~60쪽(부산 해운대구 재반로)
원풍모방 공장에서 농성하던 노조원들은 전투경찰과 형사들에게 쫓길 때마다 〈애국가〉를 불렀다고 합니다. 이러면 형사들은 노조원들을 쫓다 말고 “가슴에 손을 얹고 노래가 끝나기를 기다렸다.”라고 합니다.
본문 133~134쪽(원풍모방을 기억하는 관점)
벌말이라는 이름대로 벌판에 마을이 군데군데 자리하던 평촌동과 주변 지역은, 이름이 주는 한적한 농촌 이미지와는 달리 특수 시설이 밀집한 안양과 의왕의 경계였습니다. 지금도 이 일대에는 오뚜기 안양공장을 비롯한 산업 시설, 열병합발전소, 변전소, 자원 회수 시설, 안양농수산물시장, 안양교도소, 한센병력자 정착 시설인 성라자로마을, 모락산 자락의 예비군 훈련장, 수도권제1순환고속도로 등의 ‘특수 시설’이 모여 있지요.
본문 166~168쪽(평촌 신도시와 안양 벌말)
가파른 산길을 15분쯤 걸어 오르자 전포돌산공원과 황령산을 잇는 능선이 나타났습니다. 부산진구 진남로283번길과 남구 돌산길이 만나는, 속칭 ‘문현동 안동네 벽화 마을’의 최정상 지점에 다다른 것입니다. 남쪽으로 뻗어 있는 깊은 골짜기에는 단독주택부터 고층 아파트까지, 현대 한국의 거의 모든 건물 형태가 뒤섞여 있었습니다.
길 중간에는 2008년에 세워진 벽화 마을 안내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안내판의 코팅을 누군가가 뜯어 버렸는지 거의 알아볼 수 없는 상태였지요. 이 길에서 영업했을 ‘레트로 감성 돋는’ 몇몇 가게도 폐업한 지 오래였습니다. 산 능선에서 문현동 벽화 마을로 내려가는 돌산3길 초입에는, 벽화 거리가 시작된다는 그림과 나란히 ‘돌산마을 생존권 투쟁 협의회 / 끝장 투쟁 사무소’가 자리했습니다.
수풀이 무성하게 우거져서, 과연 아직도 길로서 기능하고 있는 것인지 의심스러운 돌산3길. 하지만 조금 내려가니 경로당이 나오고, 2020년 2월 26일 부산광역시 남구청장 명의로 작성된 코로나19 확산 관련 안내문이 출입구에 붙어 있었습니다. 이 마을이, 이 길이 2020년 초까지도 기능하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본문 182~183쪽(부산 문현동 벽화 마을)
대도시 바깥을 답사할 때는 ‘월드 마트’, ‘할랄 마트’ 등의 점포가 얼마나 존재하는지로 다인종·다문화 정도를 확인합니다. 향남읍 구도심에는 이들 점포가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들어서 있습니다. ‘한국이 다인종·다문화 국가가 되어야 하는가, 아닌가?’ 하는 대도시 일부 시민의 논의가 얼마나 현실과 동떨어졌는지를 향남의 옛 신작로를 걸으면 알게 됩니다.